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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덕PD의 명상에세이 (1)
박동덕PD의 명상에세이
 

01. 명상에 대한 조금 긴 프롤로그

- 내면의 혁명을 꿈꾸다

       
2001년인가 그해 가을,

신설동에 있는 보리수선원에서

아내와 함께 비파사나를 배웠다.




당시 보리수선원을 찾은 것은 고타마 싯달타가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수행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어느 날 맞닥뜨린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비극 때문이었고

그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못 할 것이 없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다면

불시에 세상을 떠난 딸 아이를 불러오는

신통력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붓다락키따 스님께 삼배를 하고

생전 처음 수행이라는 것을 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반신반의 했다.

“이것으로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었다고?”




당시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고

이왕 발을 들인 김에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고 생각한다.




비파사나를 배우고 나서

나는 내 생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숨이 들고날 때의 미묘함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사티(Sati/Mindfullness/마음챙김)를 했다.




물론 처음에는 잘 안되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것이 잘 안 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누가 그걸 알아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일이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어

우주 어딘가에서 딸아이를 만나야겠다는 초심은

무심히 흐르는 세월에 무디어져지긴 했지만

내 안 깊숙한 곳에서는 여전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좌선을 했고

문득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사티를 했다.




처음 몇 개월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일부러 수행을 외면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작정 시간을 낭비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생활이라는 컨베이어벨트에 오르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던히도 멀리 와 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수행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자책하게 되면 초심을 떠올리고 사티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책이 많아질수록

사티를 하게 되는 시간은 늘어갔다.




바야흐로 명상의 시대이다.

요즘엔 마음챙김명상이나 마인드풀니스라고도 한다.

시대의 패러다임은 힐링, 케렌시아, 

휴식으로 이미 방향을 잡았다.




올해 6월에 EBS다큐프라임에서 <휴식의 기술>이

방영된 것은 현재를 반영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더는 일을 통해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소확행처럼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복이 미래의 언제인가에 있고

그것을 위해 현재의 나를 희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구닥다리가 된 것이다.




이제는 행복이 무지개가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행복은 무지개가 아니고

지금 나의 호주머니 속에서 꺼내 사용해야 할 물건이다.




행복이 나의 손에 있지 않다면

그래서 내가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명상을 하면 행복해지는 걸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하지만 명상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는

훌륭한 도구를 손에 쥐어준다.